[노래따라 고향따라]
'합천군가'와 합천 사람들의 애향심
‘내 고향은 합천 땅 열일곱 집이~’
17개 읍·면 모여 하나 된다는 의미 담아
노래는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다. 함께 부름으로써 동류의식과 일체감을 조성하는 기능도 그 중 하나다. 애국가와 교가 등이 그런 기능을 한다. 경상남도의 '도민의 노래'를 비롯해 각 시•군의 시•군가, 시•군민의 노래 등의 이름을 가진 도내 18개 시•군의 공식 노래도 마찬가지다. 출신학교 교가는 세월이 지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고향의 공식 노래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행사 같은데서 의전용으로만 불리다보니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 가운데 유난히 자신의 고장 노래가 애창되는 곳이 있다. '합천군가'라는 곡명의 공식 노래를 가진 합천군이다.
합천 사람들의 유난한 군가(郡歌) 사랑
합천군가의 유난함은 주요 인터넷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서 '합천군가'를 치면 알 수 있다. 합천군 관내 각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회 인터넷카페나 재외 합천군향우회 인터넷카페에 들어가면 '합천군가'의 유난함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이들 인터넷카페에는 대부분 '합천군가'가 악보와 함께 올라 있다. 일부 카페에는 <노래듣기>까지 올려놓고 있어 합천 사람들의 애향심과 '합천군가'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외지에 나가 있는 합천 향인들의 동창회나 향우회 행사 마지막에 다함께 '합천군가'를 부르는 것도 특징이다. 다른 지역의 동창회나 향우회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지난 2012년 경남도지사 보궐선거 때 합천 출신 한 후보가 고향지역 유세에서 '합천군가'를 열창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후보는 고향을 떠난 지 수십 년 됐는데도 가사와 곡조를 하나도 틀리지 않고 끝까지 불러 고향사람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이 후보는 "초등학교 때 4km를 걸어서 다녔는데 그때 친구들이랑 그 먼 길을 '합천군가'를 부르면서 다녔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사연을 소개했다.
합천 자연•지형•역사 함축 정겹게 다가와
이렇듯 '합천군가'가 다른 지역 시•군가와 달리 고향 사람들에게 오래 남아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나이든 합천 출신 중에 초등학교 때 군가(郡歌)를 열심히 연습하고 부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게 한 이유일 것도 같다.
합천출신 이주홍 선생이 노랫말을 짓고, 강수범 선생이 작곡한 '합천군가' 가사 후렴에 "내 고향은 합천 땅 열일곱 집"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열일곱 집은 노랫말을 만들 당시 합천에 있는 면의 숫자다. 후렴은 이어 "한 식구로 모여서 번영하는 집"으로 끝난다. 17개 면이 모여 합천군의 번영을 이룬다는 뜻을 담고 있다. 1979년 합천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1읍 16면이 됐으나 여전히 읍•면 숫자는 17개다.
"아 아라이 푸-르른 하늘을 이고"라는 가사로 시작돼 1절부터 3절까지 이어지는 '합천군가'는 뫼 천년 물 천년, 황매산, 낙동, 신라, 남아 죽죽, 가야 영지 등 합천의 자연과 지형,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또 예부터 합천 사람들의 살아온 모습과 미래지향적인 희망을 담아 노랫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고향 사람들에겐 정겹게 다가온다.
예전엔 '합천애향가'가 합천군가
합천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는 합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함께 곧잘 부르는 노래가 한 곡 더 있다. "서운이 싸고도는 가야산 숲속에서"로 시작되는 '합천애향가'다. 1절부터 4절, 역시 후렴으로 구성된 '합천애향가'에도 해인사, 팔만대장경, 함벽루, 허굴산, 황계폭포, 황강, 십칠 면, 대야성 등 지금도 합천의 자랑인 비경과 역사를 상세하게 담고 있다. 예전엔 '합천애향가'가 합천군가였고, 합천인들이 즐겨 불렀다고 한다. 해방 후 1948년경 당시 한찬석 합천군수가 노랫말을 짓고 '합천군가'를 작곡한 강수범 선생이 곡을 붙인 노래다.
----------------
합천 출신 작곡가 강수범 선생
통영 출신 음악가 윤이상과 교유
합천애향가와 합천군가를 작곡한 강수범 선생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합천이 낳은 뛰어난 음악가다.
1920년 당시 합천면에서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강수범 선생은 1934년 합천보통학교(초등)를 졸업하고 곧바로 대구 계성학교로 유학해 학교장인 선교사의 부인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우면서 음악과 연을 맺었다고 한다.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명문 메이지대학 상과에 진학해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음악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 당시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있던 통영출신 윤이상 선생과 잦은 교류를 하며 음악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귀국한 선생은 공립부산제일상고(뒷날 경남상고)에서 상업교사 생활을 시작했으나 전공보다 음악지도에 더 관심을 뒀다. 이즈음 한찬석 당시 군수가 노랫말을 만든 '합천애향가'를 작곡했다.
윤이상 선생과의 인연은 국내에서도 이어졌다. 역시 부산에서 음악교사로 있던 윤이상 선생의 결혼식에서 피아노로 축가를 연주하고, 윤이상 선생의 소개로 부인을 만나 결혼할 정도로 친했다.
선생은 부산시내 여러 중•고교 교사를 거치면서 음악을 지도했다. 선생이 지도한 학교 합창단은 부산시내 학생 음악경연에서 항상 선두를 차지했다. 1997년 작고할 때까지 여러 학교의 교가를 작곡하고 부산시 음악교육상과 국민포장, 국민훈장 동백장을 비롯한 여러 포상을 받았다.
글 최춘환 편집장/사진 합천군 제공
[경남공감] 2014년 1월호(Vol.10)
'마음을 풍요롭게 > 노래따라고향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안 악양루와 '처녀뱃사공' (0) | 2020.05.13 |
---|---|
창원 천주산 자락 '고향의 봄' (0) | 2020.05.13 |
동요 '산토끼'의 고향 창녕 (0) | 2020.05.07 |
남해 상주 바다 배경 '밤배' (0) | 2020.05.02 |
'삼천포아가씨'의 애절한 사연 (0) | 2020.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