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풍요롭게/탐방

함양 선비문화탐방로

고룡이 2021. 8. 26. 09:02

가을에 걷기 좋은 길

함양 선비문화탐방로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는

선비의 길에서 세상일을 잊는다

 

백두대간이 뻗어 내리다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건너뛰면서 빚어낸 곳에 자리해 산과 계곡이 아름다운 함양. 좌안동 우함양이라 할 만큼 함양은 조선시대 영남 유림의 본산으로 이름을 떨쳤다. 자연과 인문이 조화를 이룬 선비의 고장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선비문화탐방길

낙동강 서쪽 경상우도의 선비들이 노닐었던 곳으로 이름난 함양의 화림동 계곡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의 상류 금천이 서상면과 서하면을 흘러내리면서 계곡에 기이한 바위와 소를 만들고, 농월정에 이르러 너럭바위 위에 옥류(玉流)를 빚어낸다.

 

화림동 계곡은 옛날 과거 보러 길을 나섰던 영남 유생들이 덕유산 육십령을 넘기 전에 지나던 길목으로 계곡을 따라 소()와 정자가 많아 예부터 팔담팔정(八潭八亭)으로 불렸다. 이곳에 거연정-군자정-영귀정-동호정-경모정-람천정-농월정까지 6를 잇는 선비문화탐방로가 조성돼 심신이 지친 현대인들을 잠시나마 선비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옛날 선비들이 지났던 숲과 계곡을 조망하며 걷다가 지치면 정자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다. 선비문화탐방관이 있는 옛 봉전초등학교 앞 거연정에서 농월정에 이르는 구간은 옛 선비들이 지나쳤던 숲과 계곡, 정자의 자태를 보며 걷는 길이다. 지도엔 7개의 정자가 그려져 있지만, 옛 모습을 간직한 정자는 거연정과 동호정, 농월정이었으나 2003년 소실됐던 농월정은 지난 9월 복원돼 새로운 모습으로 선보이고 있다.

거연정

선비문화탐방길의 출발지점이라 할 수 있는 거연정은 화림동 계곡의 다른 정자들과 마찬가지로 바위 위에 터를 잡고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조화를 이룬다. 그런 만큼 거연정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33호로 지정돼 있다. 자연에 내가 거하고, 내가 자연에 거하니 길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세상일을 잊게 하는 곳이라는 안내판 글귀가 눈길을 끈다.

 

거연정 앞 봉전교 아래로 흐르는 금천의 물소리가 화창한 가을볕과 어울려 청량감을 더한다. 아름다운 가을풍경과 계곡의 시원함을 느끼고 싶을 때 찾는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봉전교에서 다곡교에 이르는 1남짓 나무다리와 데크로 이어지는 숲길은 계곡 물소리를 따라 시원한 가을바람과 함께 걷는 길이다. 숲길을 벗어나면 앞이 탁 트이며 시멘트로 포장된 마을길이 이어진다.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아래로 난 논과 사과 과수원을 따라가면 다시 숲길에 들어선다. 나무다리를 조금 걷다보면 계곡 건너 너럭바위가 펼쳐지고 옛 모습을 간직한 동호정(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81)이 주변 소나무 숲과 저 멀리 황석산 자락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동호정 앞 해를 가릴 정도로 넓은 바위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차일암(遮日岩)은 옛 선비가 넓은 반석에는 천 명이나 앉을 수 있고 큰 바위엔 악기를 백 개나 매달 수 있네라고 읊었을 정도다. 계곡에서 물고기와 다슬기를 잡는 천렵꾼들의 모습이 여유롭다.

 

호성마을을 지나 람천정에 이르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에서 임시탐방로 안내에 따라 걷는 길이 주변을 조망하기에 더 좋다. 왼쪽 저 멀리 정상 부근에 바위가 보이는 산이 황석산성이 있는 황석산이다. 황석산성은 정유재란 때 안음현감 곽준과 함양군수 조종도가 인근 백성들과 함께 왜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선비문화탐방로가 이어지는 서하교 건너 황암사는 황석산성에서 순국한 곽준, 조종도를 비롯해 3500여 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가을이면 현풍곽씨함안조씨 문중과 함양거창의 유림들이 모여 추모제향을 봉행한다.

 

서하교에서 길을 재촉해 조금 더 내려가면 탐방로 1구간 마지막 지점인 농월정. 백옥 같은 넓은 바위가 펼쳐진 계곡은 마치 흰 구름이 내려앉은 듯하다. 여유로운 계곡 풍경이 길손의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농월정은 조선 중기 학자 지족당 박명부가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유배에 부당함을 지목하다 파직되자 낙향해 지었다는 정자다.

농월정과 계곡

바위 위 물살이 움푹 파 놓은 웅덩이들에 물이 들어차 잔잔한 얼룩무늬를 이룬 모양이 신비롭다. 바위 이름도 달빛이 비치는 바위 못라는 뜻의 월연암(月淵岩)이다. 이곳에 막걸리를 쏟아 붓고, 꽃잎이나 솔잎을 띄워 바가지로 퍼 마셨다고 하니 한 잔 술로 달을 희롱한다는 농월(弄月)도 여기서 비롯된 듯하다.

 

경남공감201511월호[Vol.32]

·사진 최춘환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