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인물

내 이름은 '김치5'

고룡이 2020. 6. 30. 15:53

흥남철수 피난선에서 태어난 아기

“내 이름은 ‘김치5’였다”

이경필 장승포가축병원장

경남공감201606월호[Vol.39]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이어진 6·25전쟁 기간 동안에는 전쟁의 참화만큼 숱한 사연과 이야기를 만들었다. 6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벌써 아득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아직도 우리 주변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역사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좀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

·사진 이한나 편집위원

 

19501225일 크리스마스 새벽. 흥남철수작전의 마지막 미군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14000여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조용한 바다를 가르며 거제도 장승포항에 들어섰다. 그 전날 부산항에 입항했지만 부산은 군인과 피난민 등으로 꽉 차 있어 인원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당국의 판단에 따라 뱃머리를 장승포항으로 돌렸다.

 

이틀 전 출발한 함경남도 흥남항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위급해지고, 혹한이 몰아쳤다. 하지만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이곳은 상대적으로 온화하고, 평온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장승포항에 들어서는 그 시각 배 안에서 한 사내아이가 세상과 마주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좁은 배의 화물칸, 여자들이 둘러서서 쳐준 장막 한가운데서 태어났다. 고령의 산파가 앞니로 탯줄을 끊었다고 한다. 이름 하여 김치5(Kimchi five)’. 지난해 영화 <국제시장>이 흥행하면서 마지막 덕수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이경필(66) 장승포가축병원장의 태어날 때 이름이다.

 

1223일 흥남항을 출발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장승포항에 피난민들을 무사히 내려놓을 때까지 5명의 새 생명을 안았다. 당시 미군은 수송선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김치(Kimchi)’라는 호칭과 함께 순서에 따라 1부터 5까지 차례로 붙였다. 막내인 김치5’는 죽음을 무릅쓴 항해 끝에 크리스마스에 태어나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김치5’5명의 김치 중 좀 더 특별함을 갖고 있다. 그날 강보에 싸여 어머니의 품에서 장승포항에 내린 신생아는 대학을 다닐 때와 군복무 때를 제외하고는 여태껏 거제도를 떠난 적이 없다. 빅토리호에서 사흘간 태어난 5명 중에서도 유일하다. 그것도 태어난 장승포항을 바라보는 장승포에서만 살고 있다.

 

이 원장이 장승포에 뿌리내리고 사는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군 복무를 마쳤을 때 그의 아버지는 빨리 거제로 돌아오라고 재촉했다. 이후에도 줄곧 섬을 떠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아무것도 없는 우리를 받아준 거제 주민들에게 늘 감사하고,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봉사하며 살아라는 아버지의 뜻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경상대 수의학과를 졸업하고 수의사로 평생을 살아온 이 원장은 나이가 든 요즘도 출장 진료가 대부분이다. 전문 진료 가축이 소와 돼지 등 대형동물이라 하루 30왕진은 예사다. 그러면서 약값을 절반 정도만 받을 때가 더 많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 원장을 바보 수의사라고 부른다.

 

흥남에서 사진관을 운영했던 이 원장의 아버지는 장승포에서도 평화사진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사진관을 운영했다. 잡화점을 운영한 어머니 또한 가게 이름을 평화상회로 할 정도로 부모님은 자유와 평화에 대한 생각이 강했다.

 

부모님과 함께 수송선을 타고 온 이 원장의 형은 월남전에 참전했다. 형은 고엽제 후유증을 앓다가 수년 전 세상을 떠났다.

 

그런 가족사의 배경을 가진 이 원장은 안보와 자유, 평화에 대한 신념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는 ROTC 11기 장교로 강원도 철원에서 군복무를 했다.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공군 중령인 그의 장남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전투기조종사다.

 

이 원장은 특히 청년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 건전한 통일관을 심어주는 데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학 등에 역사 강연을 다니는 이 원장은 요즘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겁다. 지난 513일 국가보훈처가 내년도 정부 예산에 흥남철수기념공원 연구용역비 1억원을 반영했다고 밝히면서 그가 추진해 온 기념관 건립 사업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기념공원은 세계 최대 인명구조작전이라 불리는 흥남철수작전을 재조명하고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추진된다. 장승포항 일원에 흥남철수작전 상징조형물과 전시관전망대 등을 세우고, 해체된 메러디스 빅토리호 대신 당시 같은 임무를 수행한 레인 빅토리호 를 미국에서 사와 전시할 계획이다.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거제지회장으로 활동하며 흥남철수기념공원 사업 추진에 발 벗고 나선 이 원장은 요즘 젊은이들의 역사 인식을 걱정한다. “한국전쟁이 언제부터 언제까지 이어졌는지도 잘 모르는 학생들이 흥남철수작전을 잘 알겠느냐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은 윗세대의 은혜를 입은 자손들의 의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