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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출신 최균•최강 의병장

고룡이 2020. 6. 2. 00:01

의병의 날에 고성 출신 의병장 최균•최강 형제를 생각한다

 

임진왜란 경남의 의병
'호국보훈의 달'이 시작되는 6월 1일은 '의병의 날'이다. 의병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0년 제정한 기념일이다.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 따라 매년 6월 1일로 지정됐다.
경남에는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까지 7년간의 왜란 기간동안 민초와 함께 나라를 지킨 의병장들이 많다. 의령에서 창의해 의령•삼가•합천 등 여러 고을을 지켜내고 왜적의 호남 진격을 막은 홍의장군 곽재우, 초유사 김성일과 함께 영남지역 의병을 모으고 정유재란 때 함양 황석산성에서 결사항전으로 왜적의 한양 진격을 저지한 조종도 등이 유명하다.

 

최균•최강 장군을 모신 도산서원(고성 구만면)

남해 일대 백성 보호•구출

곽재우•조종도 만큼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분들 못지않게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나라와 백성을 지킨 의병장도 있다. 그 중 고성에서 창의한 의민공(義敏公) 최균(崔均)•의숙공(義肅公) 최강(崔堈)형제 의병장이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균•강 두 의병장은 균의 아들이자 강의 조카인 찰방공(察訪公) 최진호(崔振虎)와 함께 남해안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펼치며 때론 이순신 장군의 수군을 돕고, 때론 해안 내륙에서 웅천(진해)을 기점으로 창원-함안•의령-고성-진주 방면을 거쳐 호남-한양으로 진격하는 왜적을 격퇴하거나 저지했다. 특히 웅천에서 창원 쪽으로 넘어오는 왜적을 안민령에서 격퇴하고, 제1차 진주성전투를 외곽에서 지원함으로써 승리로 이끈 공이 크다. 그러면서 남해안 일대 육지 곳곳을 짓밟은 왜적들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고, 구출한 사례가 수없이 많다.
의병을 일으키고 스스로를 풍운장(風雲將)이라 칭한 최균은 학식과 인품이 높아 백성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온다. 최강은 백성들로부터 '천하의 용장'이라는 말을 들었다.

 

조직 의병 병참•전투 분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편찬한 <임진왜란과 固城 의병 활동 양상>에 임진왜란 초기 남해안 일대의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과 최균•최강 등의 의병활동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고성은 해안지역이라 수륙 양면에 적침에 노출되어 있었다.
임란초 왜적 수군이 남해안을 침략하여 원균의 경상우수군을 무찌르고 진해•고성•사천 등지로 상륙했다. 또 창원•함안 등지의 육로를 통해 침략해 오는 등 왜군의 분탕질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해로를 통해 고성에 상륙한 왜군에 대응해 의병활동을 펼친 이는 최균•촤강•이달•안신갑 등이다. 이들은 고성뿐 아니라 진주•사천•창원•웅천(진해)에 이르기까지 그 활동범위가 매우 넓었다.
특히 활동형태를 보면 조직된 의병이 병참과 전투로 역할을 분담하여 효율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적군으로부터 안전한 곳에 본진을 두고, 노인•부녀자들은 군량•군수 조달 등 병참활동으로 전투부대를 도왔다. 최강 등 젊은 의병들은 전투부대를 편성해 본진을 중심으로 여러 방면으로 유격전을 펼치며 적을 격파했다.
나이가 많은 최균은 이 일대 의병의 수장으로서 본진에 머물며 전략을 짜고 병참과 전투를 전반적으로 지휘•운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균은 학식과 병법에 능하고, 주역과 천문지리에도 해박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경상도 일대 왜적 격퇴
최균은 1537년 고성군 구만면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55세였다.

아우 강은 1559년 태어났다. 27에 무과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최강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에 33살이었으니 맏형인 최균 의병장과 22살 차이다. 3형제 중 막내인 강이 맏형인 균과 나이 차이가 많다보니 균의 네 아들 중 막내인 조카 최진호 의병장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최강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맏형인 최균에게 "우리 집안은 대대로 충효를 이어왔는데 나라가 흔들리는 이때 숲속으로 도망 가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마땅히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무찌르는 게 도리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여 형제가 의병을 일으켰다고 전해온다. 균•강 형제는 먼저 고향 구만을 노략질하던 왜적을 물리치고, 인근 의병장인 대소헌 조종도•망우당 곽재우•송암 이노•모촌 이정 등과 함께 경상도 일대 왜적을 무찔렀다.

 

진주성전투 외곽 지원
이계 홍양호(1724~1802)가 지은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 따르면 "임진년 10월 적장 등원랑이 여세를 몰아 함안을 공략하고 세 길로 갈라져서 김시민 목사가 지키고 있던 진주성을 에워쌌는데 의병장 최강과 이달이 고성에서 의병을 데려와 싸운지 5일만에 등원랑이 포위를 풀고 퇴각하면서 약탈한 부녀자와 우마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최강이 추격하여 모두 목을 베고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1차 진주성전투 관련 최강 장군의 전공이다. 함께 한 운포공 이달 역시 고성 출신으로 최균•최강 장군 사촌 누이의 아들이다. 진주 남강변 뒤벼리에는 최강 장군의 진주성전투 공적을 기리는 전적비가 있다.
1차 진주성전투 이듬해인 계사년의 제2차 진주성전투 때에도 최강•이달 장군은 진주로 구원을 갔다가 적의 세력이 너무 크고, 후방의 백성이 걱정되어 다시 고성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최강 장군은 함안의 피란민 300여명이 적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자 말을 타고 뛰어들어 밤새도록 전투를 벌여 안전하게 구출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 해전 지원
이 외에도 당항포(고성군 회화면)에 상륙해 노략질하던 왜적을 무찌른 구만전투, 담티고개(구만면과 개천면 경계) 방어전, 사천 열무다리전투, 사천 대둔령전투, 창원 안민령전투, 배둔성(고성군 회화면) 전투 등이 있다. 이순신 장군 수군의 사량(통영시 사량도)과 웅천(진해) 두 곳의 전투를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와 관련 이순신 장군이 강응황에게 보낸 서찰에서 "다행히 별장 최균과 최강의 힘을 입어 웅천의 적을 크게 이기고, 바다의 적장을 사로잡으니 마음이 통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형제 의병장의 활약을 치하했다.
특히 안민령 전투는 김해와 웅천에 웅거하던 왜적과 맞닥들인 최강이 형 최균의 책략을 바탕으로 인근 백성들과 합세해 적을 크게 물리친 전투다. 당시는 이순신 장군의 연승과 명나라의 지원군 파병으로 밀리던 왜군이 서생포(울산)에서부터 웅천에 이르는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고 응전하면서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약탈을 자행하던 시기다. 이에 조정에서는 최강 장군과 이 지역 백성들의 공을 높이 사 안민(安民)이라는 지명을 내리고 창원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이 같은 공적을 기려 창원 안민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민과 균•강의 후손인 전주최씨 창원종친회는 지난해 4월 안민고개에서 제1회 의병문화제를 개최하고, 최강 의병장의 안민령전투 전적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정유재란 뒤 가리포 첨사 제수
균•강 형제의 전공은 임진•정유 7년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어진다. 최강 의병장은 의병활동의 공을 인정 받아 정유재란이 끝난 5년 뒤인 1603년 조정으로부터 제59대 가리포 첨사에 임명된다.
완도 가리포진은 남해안 왜적 방어에 아주 중요한 병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첨사는 첨절제사의 줄인말이다. 가리포 첨사는 지금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종3품이었다고 한다. 다른 첨사들보다 2~3등급 높은 품계의 보직인 것도 특징이다. 가리포진의 중요성은 역대 첨사의 면면을 봐도 알 수 있다. 25대•36대 정걸(경상우수사•전라우수사를 지내고 임란 초기 충청수사 때 참전), 47대 이억기(전라우수사를 지내고 칠천량해전 전사), 54대 이순신(삼도수군통제사•노량해전 전사), 55대 이응표(임난 후 전라우수사), 56대 이영남(노량해전 전사) 등 이순신 장군의 승전에 공을 세워 난중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맹장들이다.

 

화공법으로 왜적선 격퇴
이렇게 군사상 중요한 진영의 수장에 부임한 최강 장군은 왜구의 출몰에 대비해 준비를 철저히 해오던 중 1605년 6월 7일 30여척의 왜적 선단이 가리포 쪽으로 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당시 가리포진에는 병력 150여명에 군선은 판옥선 1척과 병선 5척에 불과해 중과부적이었다. 하지만 최강 첨사는 "죽음을 각오하더라도 가망이 없지만,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며 병사들을 독려하고 평소 구상한 작전대로 왜선을 육지 가까이 유인해 불화살 공격으로 왜적선 대부분을 불태웠다.
최 첨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겨우 탈출해 도망가는 왜적선 3척을 노를 저어 이틀이 걸리는 추자도까지 추격하여 전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최 첨사의 군사와 군선은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이처럼 일방적인 승리는 전쟁사에서 드문 일로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에 비해 전투 규모는 작지만, 전적은 그에 못지 않다고 비유되기도 한다.

 

"임진전쟁 최종 승자"

이후 가리포는 물론 인근 남해안에 왜구의 침탈이 없어 최강 첨사의 가리포전투를 임진전쟁의 최종 마무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함께 최강 장군을 임진전쟁의 최종 승자로 부르기도 한다. 완도 석장포에 최강 장군의 가리포해전 대첩비가 있다.
말년에 낙향해 있던 최강 장군이 고성에서 세상을 떠나자 가리포 유지들이 멀리 고성까지 와서 3년상을 치르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만큼 최강 장군의 전공이 높을 뿐만 아니라 지역민들과 우호관계가 역대 첨사 중 제일로 평가받고 있다.
기록에는 가리포전투에도 첨사의 형 최균이 등장한다. 최강 장군이 가리포전투에서 쓴 화공법을 당시 가리포에 와 있던 최균이 알려줬다고 한다. 이렇듯 최강 장군의 전공에는 형 최균 의병장이 항상 뒷받침했다.
이와 같이 임진전쟁과 이후 형제의 공적이 인정돼 최균 의병장은 선무원종공신 3등, 최강 장군은 1등을 받았다.

최강 장군의 가리포해전 대첩비(전남 완도)

구만면 도산서원에 배향

1605년 6월 가리포전투에서 승리한 최강 장군은 그해 순천 부사로 자리를 옮기고, 이어 경상좌수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영전한다. 그 후 충청수사를 거치고 포도대장에 추천되었으나 광해군이 형인 임해군을 죽이라는 명을 내리자 이를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균 의병장은 무공을 인정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만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까지 올랐다. 최균 장군은 사후 호조판서에 추증되고, 의민(義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최강 장군은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의숙(義肅)이란 시호를 받았다.
균•강 형제는 고향에서 한 집에 지내면서 우애가 깊어 향인들은 그 집을 '효우려(孝友慮)'라고 했다. 형은 향년 80세로, 동생 강은 이보다 2년 전에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성군 구만면에 형제를 배향한 도산서원(道山書院, 1633년 건립)과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해동명장전•쌍충록 등에 기록

최균•최강 장군의 임진왜란 의병활약과 생애에 관한 기록은 홍양호(洪良浩 1724~1082)가 지은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과 최강 장군이 가리포첨사로 재임할 당시(1603~1605)의 '가리포첨사록', 이순신 장군이 강응황에게 보낸 서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편찬한 <임진왜란과 固城 의병 활동 양상>에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이외에 최균•최강 형제가 생전에 지은 시문과 행적을 담은 사적기(事蹟記) 형태의 '쌍충록(雙忠錄)'에 상세하게 전해온다. 쌍충록은 최균 의병장의 8세손 상갑(祥甲)이 편집하고 균•강 형제를 배향한 도산서원에서 간행한 4권2책의 목판본으로 1823년(순조 23년) 제작됐다. 규장각 도서와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최균•최강 장군 신도비(고성 구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