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인물

김종대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고룡이 2017. 10. 19. 10:11

【김종대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경남공감 2014년 5월호[Vol.14]>

 

38년간 이순신 정신 알리는 전도사

'신은 이미 준비를 마쳤나이다'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순신을 제대로 알리는 일이라면 강연장이건, 영화촬영장이건, 심지어 퀴즈대회장까지 어디든 가는 사람이 있다. 김종대(66)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이다. 판사부터 시작해 헌법재판관까지 올랐고, 후배들의 신망을 받는 법조인이다. 하지만 출세한 법조인이라서 그를 만난 게 아니다. '이순신 전도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접하고 김 전 재판관을 만나 이순신을 연구하게 된 동기와 그가 보는 이순신에 대해 들었다.

/ 글·사진 최춘환 편집장

김종대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김 전 재판관은 스스로 '이순신병에 단단히 걸린 사람'이라고 말한다. 38년째 이순신에 매달려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정도밖에 아는 게 없었던 그가 이순신에 빠져들게 된 건 스물일곱 살 때인 1975년이다. 군법무관 당시 노산 이은상 선생이 쓴 문고판 <이순신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을 교재로 공군 법무감실 정훈교육을 했을 때부터다.

인터뷰 도중 보여준 노산 선생의 문고판 책은 표지를 단단한 것으로 새롭게 입혀 놓았으나 책장은 모서리가 해져 있었다. 지금까지 50회 이상은 읽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럴수록 우리사회가 이순신의 생애와 정신·사상을 배워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본격 시작한 게 이순신의 생애와 사상을 압축하고 정리한 책을 쓰는 일이었다. 2002년 펴낸 <이순신 평전>이 그것이다. 그리고 좀 더 많은 문헌을 참고하고, 이어서 이순신의 리더십을 정리한 책을 내 놨다. 지금까지 다섯 권이나 펴냈다.

 

김 전 재판관은 단순히 이순신 연구에만 머물지 않는다. 강연 등을 통해 이순신을 알리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대기업 CEO를 비롯한 사회 오피니언리더 등 소수 집단은 물론, 대학·기업·관공서 등 연수나 교육에 '이순신 강사'로 나선다. 지난해에는 강연을 서른 번 정도 했다. 언론매체 등의 기고를 통해서도 이순신을 전파한다.

최근에는 어린 세대와 대중들에게 이순신을 제대로 알리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지금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만화책을 만들고 있다. '신은 이미 준비를 마쳤나이다'와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만화책이 오는 6월 나올 예정이다.

 

이야기 도중 '최종병기 활'을 제작한 김한민 감독의 차기작 '명량-회오리바다'라는 영화를 홍보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오는 7월 셋째 주 토요일에 개봉한다"며 "이순신을 국민들 가까이에 다가가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광양항 부두에서 촬영시작 고사 때 참석해 격려도 했다.

충무공 사상 선양을 위해 10년 정도 뛰어다녔지만 혼자서는 이제 한계를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이순신 아카데미' 개설을 추진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이순신 전도사'를 양성하기 위해서다. 그가 제시하는 수강자의 조건은 30~50대로서 의식이 뚜렷하고 목표에 공감하는 사람이다. 수강자를 많이 모집할 생각도 없다. 20명 내외를 계획하지만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12척으로 330여척의 왜적선을 물리쳤듯이 12명만 모이면 개설할 예정이다.

 

그가 왜 이순신에 이렇게 빠져있을까? "이순신에게 배울 것은 '거북선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왜 거북선을 만들었느냐'라는데 있다"고 강조한다. "그걸 따지고 들어가 보면 창의성이 나오고, 창의성은 나라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사랑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순신 정신을 사랑·정성·정의·자력으로 압축했다.

부정과 비리는 물론, 계층·세대·지역·이념 갈등 등 오늘날 우리사회가 갖고 있는 온갖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약제가 이순신 정신에 녹아있다고 말한다. 마침 인성교육법이 제정될 예정이라 이순신을 자라나는 세대들의 인성교육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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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 부곡면 외가에서 태어나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은

1948년 창녕군 부곡면 학포리 유동마을 외가에서 출생했다. 김해 대동면에서 초등 3학년까지 다니고, 부산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부산중·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공군 법무관을 거쳐 1979년 부산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대구고법 판사와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잠시 거친 것 외에는 대부분 부산과 창원의 지법과 고법에서 근무했다. 창원지방법원장을 지내고 지난 2006년 헌법재판소 재판관에 올랐다. 2012년 퇴임하고 지금은 국내 대표 회계법인인 '삼일회계법인'과 부산지역 대표 법무법인인 '법무법인 국제'의 고문으로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다.

부산고법 재판장 당시 조정을 통해 삼성자동차의 파산을 막고 '르노삼성'을 탄생시키는 등 부산·경남 법조계에서 '분쟁을 그치게 하는 조정분야에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스스로는 '도롱뇽 재판장'으로 이름이 알려졌던 천성산 고속철 공사 재판 때 조정에 실패한 일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헌법재판관 퇴임 때는 나경원 전 국회의원을 비롯해 30여 명의 전·현직 후배 판사들이 직접 글을 써 그를 위한 책을 엮을 정도로 신망이 두텁다.

김 전 재판관은 마을 사람들이 '버드리'라고 부르는 유동마을이 가장 고향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얼마 전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버드리의 외할아버지·외할머니 산소에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