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풍요롭게/가볼만한 곳

영남알프스의 가을

고룡이 2017. 10. 19. 10:56

【영남알프스】 <경남공감 2013년 11월호>

억새와 바람, 하늘이 만난다

그 곳에서 사색할 사람 오라

 

경남 밀양시와 양산시, 울산 울주군, 경북 청도군과 경주시에 걸쳐 광활하게 펼쳐진 영남알프스. 대동여지도 산경표에서 분류한 한반도의 1대간 1정간 13정맥 중 태백산 북동쪽 매봉산에서 시작하는 낙동정맥의 끝자락에 포진한 주요 산군(山群)을 일컫는다. 이곳에는 높이가 가장 높은 가지산을 비롯해 운문산과 재약산, 영축산, 신불산, 간월산 등 해발 1000m를 넘는 준봉들이 경남과 울산, 경북의 5개 시·군과 경계를 이루며 솟아있다. 이들 준봉 휘하에는 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 산세를 뽐내는 수많은 산들이 이어지며 곳곳에 능선과 평원을 이루고 아래로는 계곡을 빚어낸다.

/ 최춘환 편집장 사진 밀양시‧양산시 제공

 

늦가을 등산 생각하면 떠오르는 곳

가을산, 특히 늦가을 등산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곳이 영남알프스다. 고지대에 펼쳐진 억새밭과 때론 선들선들 불어오다 때론 차갑게 얼굴을 스쳐가는 가을바람, 그리고 그 바람 따라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는 구름이 연출하는 전경과 느낌이 겹쳐지면서 산꾼들을 유혹한다. 영남알프스는 워낙 방대한 산군인데다 산행구간이 수없이 많아 주요 등산로만 따라가더라도 장기계획을 잡아야 한다.

한두 개 구간만 다녀와도 좋다. 굳이 구간을 따질 것 없이 그저 접근하기 좋은 곳을 택해 홀가분하게 가을정취를 느끼며 사색하는 것도 괜찮다.

영남알프스 밀양 쪽 대표 산인 재약산은 북쪽의 사자봉(1189m)과 남쪽의 수미봉(1108m)을 두 축으로 동쪽에 해발 700~800여m의 고원지대인 사자평원을 거느리고, 서쪽 자락에 표충사를 품고 있다. 기상이 사자처럼 힘차고 늠름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사자봉은 국립지리원이 발행한 5만분의 1지형도에는 천황산으로, 대신 수미봉이 재약산으로 표기돼 있다. 산꾼들은 천황산이 일제의 개명으로 붙여진 이름이라하여 '재약산 사자봉'이라 부른다. 재약산은 북쪽인 얼음골과 영남알프스 하늘억새길의 4구간인 단풍사색길 종주코스의 능동산 쪽에서 접근하는 코스, 표충사에서 출발하는 코스로 오른다.

제약산 사자평의 억새군락지

 

얼음골 케이블카 타고 단풍 감상

얼음골 케이블카를 설치하면서 상부 승강장에서 녹산대 전망대까지 가는 하늘사랑길에서 사자봉으로 등산로가 이어지도록 설계했으나 산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차단돼 있다. 이맘때 얼음골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 얼음골 주변 단풍이 일품이다. 활엽수가 많은데다 남부지방엔 단풍이 늦게 들어 11월 중순까지 계곡에서 산 능선까지 오색물결을 이룬다. 상부 승강장에 내려 하늘정원 데크로드를 걸으며 동쪽에 펼쳐진 사자평 억새와 영남알프스 산군의 원경을 조망할 수 있다.

케이블카 상부 승강장 전망대인 녹산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하얀 바위가 구름 같이 펼쳐졌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백운산, 그 뒤 왼쪽에는 국내 최대 비구니 강원(講院)인 운문사로 유명한 운문산이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역시 비구니 수도장을 품고 있는 가지산이 멀리 보인다. 백운산 자락에는 호박소와 오천평반석 등 밀양의 비경이 숨겨져 있다. 데크로드에서 편하게 사자봉에 접근할 수 없어 아쉽지만, 이정도면 아쉬움을 달랠만하다.

표충사에서 재약산에 오르는 길은 적게는 세 갈래, 많게는 여섯 갈래다. 우선 북쪽으로 금강폭포-한계암을 거쳐 사자봉에 오른 길, 내원암에서 곧바로 천황재를 거쳐 가는 길, 역시 내원암을 거쳐 진불암에서 천황재와 수미봉으로 갈라지는 길이다. 표충사 뒤를 돌아가는 길은 또 두 갈래로 나뉜다. 문수봉을 거쳐 수미봉에 접근하는 길과 고사리분교터를 거쳐 수미봉으로 가는 길이다. 나머지는 남서방향으로 가다 홍류동계곡-층층폭포-고사리분교터를 지나 수미봉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가을바람 느끼며 표충사서 재약산 올라

이들 등산길은 평범하다. 금강폭포와 층층폭포 쪽은 가뭄이 계속되는 가을이라 폭포의 시원한 물줄기를 기대할 수 없지만,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단풍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다른 코스는 대체로 능선을 따라 올라간다. 좀 빨리 정상에 접근하는 길이다. 그래서 이맘때면 다소 삭막한 분위기지만, 가을바람을 느끼며 주변 산세를 조망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재약산 등산만 한다면 수미봉과 사자봉에 올랐다가 다양한 하산길을 택할 수 있다. 얼음골 쪽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전체 산행시간은 대략 5~6시간이다.

재약산의 진가는 정상 부근에 오르면 느낀다. 천황재를 사이에 두고 사자봉과 수미봉이 남북으로 호위무사처럼 서 있다. 전체적으로 산세가 부드러우면서도 정상 일대는 거대한 바위다. 수미봉은 큰 바위가 암벽을 형성하고 있다. 사방을 둘러보면 굽이굽이 산이다. 밀양 방향의 서쪽 산자락엔 울긋불긋 단풍이 수를 놓은 듯 점점이 흩어져 있다. 반대로 고개를 돌리면 사자평원의 억새군락과 둥글게 이어지는 능선이 잿빛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1000m 넘나드는 능선 따라 이어진 하늘억새길

여기서 동쪽으로 멀리 펼쳐진 영남알프스 하늘억새길을 둘러보자. 사자봉에서 시계 바늘 방향으로 능동산과 배내고개, 간월산, 간월재, 신불산, 영축산을 거쳐 다시 수미봉과 사자봉으로 이어지는 환상(環狀) 길이다. 이 길은 전체 길이가 30㎞에 이르는 국내에서 가장 긴 억새탐방길이다. 대부분 해발 1000m를 넘나드는 능선을 따라 이어져 역시 국내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조성된 둘레길이기도 하다. 곳곳에 억새평원이 펼쳐지고 맑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손에 잡힐 듯해 이름 그대로 하늘억새길이다.

하늘억새길은 다섯 개 구간으로 나눠져 있다. 구간마다 붙여진 이름만 들어도 특색을 알 수 있다.

먼저 사자봉에서 왼쪽으로 얼음골삼거리, 샘물산장, 능동산, 배내고개까지 이어지는 단풍사색길이다. 하늘억새길 구간 분류로는 4구간이다. 사계절 모두 아름다운 길이지만, 얼음골과 석남재, 배내골 단풍이 일품인데다 고지대 능선의 평평한 임도를 걸으며 사색하기에 딱 좋은 길이다. 전체 7㎞에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이어지는 5구간은 달오름길. 배내고개에서 간월재까지다. 재약산과 운문산쪽으로 해가 지면 동쪽의 달이 이 구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간월산으로 이동한다는 시·공간적 의미를 담고 있다. 전체 4.8㎞를 3시간 정도에 끝낼 수 있다.

이어서 이맘때면 바람에 흩날리는 억새가 장관을 연출하는 1구간이다. 그래서 이름도 억새바람길이다. 울산 쪽 간월재에서 신불산, 신불재, 양산의 영축산으로 이어진다. 전체 길이가 4.5㎞로 3시간 정도 걸린다.

이제 영축산에서 죽전마을까지 이어지는 단조성터길(2구간)이다. 중간 지점에 위치한 '단조성터'를 테마로 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6.6㎞이나 대체로 내리막길인데다 평탄해 2시간 30분 정도 잡으면 된다. 마지막으로 전국 최대 억새평원인 사자평억새를 콘셉트로 한 사자평억새길(3구간)이다. 죽전마을에서 향로봉갈림길, 주암삼거리, 수미봉, 천황재, 사자봉으로 돌아온다. 6.8㎞ 거리에 산행시간은 4시간 정도다.

 

신라 화랑도가 수련한 광활한 벌판

다시 사자봉에서 시선을 아래로 향하면 그 유명한 재약산 사자평원이다. 그냥 사자평이라고 부른다. 드넓은 평원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물결이 마치 너울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떠오르게 한다. 넓이가 400만여㎡에 달하는데다 억새풀과 관목으로만 이루어져 그야말로 대평원이다.

사자평은 사자봉을 필두로 수미봉-관음봉-문수봉-재약봉-고암봉-향로봉-필봉 등 8개의 주요 봉우리에 둘러싸여 골짜기를 중심으로 접이부채 2개를 마주 펼쳐놓은 형상이다. 8부 능선에 형성된 타원형의 광활한 분지가 주는 감동이 남다르다. 말을 타고 벌판을 달리는 역사드라마 속 무사의 모습이 잠시 떠오른다.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용솟음쳐 천하를 호령하고픈 환상에 잠시 빠지기도 한다.

아니나 다를까 신라시대 삼국통일의 주역 화랑도가 수련한 곳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훈련한 유서 깊은 곳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심신을 수련하며 학문을 닦은 명산이다. ·순반란사건 때는 빨치산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화전민이 이곳에 밭을 일구어 고랭지 채소와 약재를 재배한 적도 있다. 그래서 한때는 사자평 언저리에 80여 가구의 민가가 형성돼 고사리학교라는 이름의 밀양 산동초등학교 분교가 개설되기도 했다. 수미봉에서 표충사 쪽으로 하산하는 길에 지금도 고사리학교 흔적이 남아있다.

 

재약 8경 중 하나 '광평추파(廣坪秋波)'

사자평은 1980년대에 목장을 조성하기 위해 큰 나무를 베어내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고 한다. 당시 목장 흔적을 보여주는 폐건물이 관목과 억새에 파묻혀 있다. 목장이 어떤 연유에서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그대로 있었다면 대관령목장 못지않은 모습을 연출할 수 있지 않을까.

사자평은 예전엔 억새풀이 밀집해 자라는 곳만도 16만여㎡에 이르렀다. 그래서 가을철 사자평 억새 풍광을 '광평추파(廣坪秋波)'라 했다. 재약 8경 가운데 하나다. 사자봉에서 가을바람을 맞으면 천황재를 향해 천천히 내려가 사자평 속살에 가까이가면 곳곳에 나무가 많이 자라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사자평은 2007년 꼭 보전해야 할 한국의 자연문화유산으로 선정됐다. 평원 저지대에 형성된 산들늪은 2006년 고산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환경부는 영남의 대표 고층습지인 사자평을 오는 2015년까지 복원한다. 늪의 육지화를 막기 위해 등산로에 생태탐방로를 설치하고 배수로 정비한다. 억새를 심는 등 생태를 복원해 습지의 원래 기능을 회복시킬 계획이다. 그래서인지 포클레인 소리가 들리고 덤프트럭이 쉴 새 없이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요즘 사자평을 찾으면 흠이지만, 멀리서 조망하면 그것도 하나의 풍경이다.

 

임란 때 수많은 의병 피 흘린 단조성터

영축산을 기점으로 한 단조성터길을 따라가 보자. 영축산(靈鷲山)은 신령스런 독수리의 산이란 뜻을 갖고 있다. 예전에는 독수리가 많았던 곳으로 보인다. 취서산(鷲棲山)으로도 부른다. 영축산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곳곳에 기암괴석과 노송이 어우러져 있다. 천년고찰 통도사를 품고 있는 후덕한 산이다.

양산 쪽에서 영축산을 오르는 가장 짧은 길은 통도사에서 지산리와 취서산장을 거쳐 가는 직등코스다. 영축산에 올라 통도사를 뒤로하고 영남알프스를 바라보면 오른쪽이 신불산이다. 하늘억새길의 1구간 억새바람길이 눈에 들어온다. 억새밭 사이로 난 산길과 데크로드가 유혹한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왼쪽으로 재약산을 보며 발걸음을 옮긴다.

전체적으로 완만하게 내리 걷는 하늘억새길 2구간 단조성터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해발 900m가 넘는 능선에 광활한 평원이 펼쳐진다. 250만㎡의 억새군락지와 고산늪지인 단조늪으로 이루어진 신불평원이다. 늪지를 둘러싼 산성이 단조성(丹鳥城)이다. 신라시대 때 축조돼 임진왜란 때도 왜군의 북상을 저지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양산시와 울주군의 경계에 있어 영남 땅을 형성한 신라 때부터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오래된 성은 돌무더기로 변했으나 억새군락을 사이에 두고 긴 띠를 풀어놓은 듯 석성의 흔적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곳 지형이 단지모양이라 하여 단지성(丹之城)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취서산고성(鷲棲山古城)으로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 당시 성을 지키던 수많은 의병들이 왜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고, 그들이 흘린 피가 못을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영남인의 삶의 애환과 호국정신 깃들어

사자평과 신불평원의 역사이야기에서 보듯 영남알프스에는 영남인의 삶의 애환과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다. 영남 3개 광역 시·, 5개 기초 시·군에 걸쳐있는 영남알프스 이름의 유래가 궁금하다. 유럽의 알프스산맥을 연상케 하기에 더욱 그렇다. 일본 알프스, 뉴질랜드 알프스 등 다른 나라에도 알프스라는 명칭을 가진 산군들이 있다.

초입에는 키 큰 나무로 형성된 울창한 산림, 그 위로는 작은 키의 나무와 풀들이 넓게 펼쳐진 광활한 능선과 평원, 정상 부근에는 하얀 눈으로 뒤덮인 거대한 산군. 알프스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영남알프스는 눈이라는 소재에서 알프스 이미지와 다소 떨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겨울철 이곳은 영남지방치곤 눈이 제법 쌓이는 지역이다.

영남알프스라는 명칭의 유래는 아직 명확하게 정리돼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부터 불렀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일본 북알프스를 다녀 온 지역 산악인들이 비슷한 풍경을 연상하고 부른 게 입을 타고 확산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두 가지 모두 일본과 연관돼 거부감도 있으나 지금 이 산군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은 영남알프스다.

옛날 신문과 책자 등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영남알프스'라는 명칭을 찾을 수 없다고 하니 일제강점기에 붙인 이름은 아니지 싶다. 80년대 목장을 조성하기도 했다니 알프스라는 이미지가 더욱 와 닿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