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풍요롭게/탐방

【경남연안 이순신해전 흔적을 찾아】

고룡이 2021. 11. 13. 23:16

【경남연안 이순신해전 흔적을 찾아】

 

거제 옥포 첫 해전

산처럼 묵직하고 침착하라

 

남해 관음포 마지막 해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이 한국 영화 역사상 최단기간 최다관객을 동원하면서 지난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다. 덩달아 마침 휴가철을 맞은 남해안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와 유적지에도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명량>의 마지막 부분에 한산대첩을 후속 작으로 예고하는 듯한 영상이 나오고, 김한민 감독이 지난 8월 13~17일에 열린 제53회 한산대첩축제 기간 중 통영을 찾아 한산대첩을 영화로 만들 것이라고 밝히면서 경남지역의 이순신 전적지와 유적지도 새삼 관심을 불러 모은다. 경남 연안에는 임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해전 유적지를 비롯해 잘 알려진 전적지 외에도 장군이 출전하면서 머물렀던 흔적도 많다. 추석 연휴에 가족과 함께 경남도내 이순신 전적지와 유적지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듯하다. 임란 해전 순서에 따라 경남연안의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이순신함대 고성 바다서 첫날밤 보내

공룡발자국화석지로 유명한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고성읍 쪽으로 이어진 하일면 춘암리와 동화리. 이곳에는 사량도를 마주보며 육지가 바다로 길게 돌출된 곶,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조그마한 포구가 형성돼 있다. 춘암리 용암포는 통영시 사량도와 가장 가까운 카페리여객선 선착장이 있다. 카페리여객선이 이곳에서 사량도 내지선착장까지 가는데 불과 10분밖에 걸리지 않아 사량도를 오가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썰물 때 갯벌이 넓게 드러나는 동화리 바다는 갯벌생태체험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동화리 마을 입구에는 조선 전기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군사주둔지로 쌓은 소을비포성지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여수에서 남해섬을 돌아 뱃길로 70㎞쯤 떨어진 동화리와 춘암리 앞바다가 임진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제1차 출전에서 첫날밤을 보낸 곳이다.

임진란이 발발하자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임진년(1592년) 5월 4일(음력) 먼동이 틀 무렵 여수의 좌수영을 출발한다. 경상 바다를 향한 장군의 역사적인 첫 출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왜적 30여만 대병력이 대마도를 거쳐 부산을 침략한 지 21일이 지난 날이자, 한양이 함락된 다음날이다.

이순신함대는 낯선 물길을 뚫고 파도를 헤치며 해안과 도서를 샅샅이 뒤지면서 나아간다. 난중일기에 상주포와 미조포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남해 섬 연안을 살피며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소비포 앞바다에 도달한 장군은 이곳에서 밤을 보낸다. 난중일기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이순신함대의 정박지는 용암포와 소비포 입구의 작은 섬으로 추정된다.

 

이순신함대 고성 바다서 첫날밤 보내

공룡발자국화석지로 유명한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고성읍 쪽으로 이어진 하일면 춘암리와 동화리. 이곳에는 사량도를 마주보며 육지가 바다로 길게 돌출된 곶,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조그마한 포구가 형성돼 있다. 춘암리 용암포는 통영시 사량도와 가장 가까운 카페리여객선 선착장이 있다. 카페리여객선이 이곳에서 사량도 내지선착장까지 가는데 불과 10분밖에 걸리지 않아 사량도를 오가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썰물 때 갯벌이 넓게 드러나는 동화리 바다는 갯벌생태체험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동화리 마을 입구에는 조선 전기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군사주둔지로 쌓은 소을비포성지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여수에서 남해섬을 돌아 뱃길로 70㎞쯤 떨어진 동화리와 춘암리 앞바다가 임진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제1차 출전에서 첫날밤을 보낸 곳이다.

임진란이 발발하자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임진년(1592년) 5월 4일(음력) 먼동이 틀 무렵 여수의 좌수영을 출발한다. 경상 바다를 향한 장군의 역사적인 첫 출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왜적 30여만 대병력이 대마도를 거쳐 부산을 침략한 지 21일이 지난 날이자, 한양이 함락된 다음날이다.

이순신함대는 낯선 물길을 뚫고 파도를 헤치며 해안과 도서를 샅샅이 뒤지면서 나아간다. 난중일기에 상주포와 미조포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남해 섬 연안을 살피며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소비포 앞바다에 도달한 장군은 이곳에서 밤을 보낸다. 난중일기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이순신함대의 정박지는 용암포와 소비포 입구의 작은 섬으로 추정된다.

 

왜적을 찾아 통영거제 해안 뒤지며 진격

동화리와 마주보는 사량도 사이의 바다는 굴양식과 여름철이면 하모로 유명한 청정해역 자란만이다. 바다는 고성군 하일면과 삼산면, 통영시 도산면, 사량도로 둘러싸여 넓게 펼쳐져 있다. 도산면 가오치항에도 카페리 선착장이 있어 통영 쪽에서 사량도를 오가는 관광객들이 이용한다.

소비포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순신 장군은 다음날인 임진년 5월 5일 경상도 수군과 만나기로 약속한 당포로 배를 저어갔다. 뱃길은 아마 청정해역 자란만이었을 것이다.

당포는 소비포에서 직선거리로 20㎞ 정도인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앞바다다. 난중일기에 당포로 기록돼 있는 삼덕리 앞바다 주변에는 오비도와 소장군도, 곤리도를 비롯해 겨울철이면 물메기로 유명한 추도, 에코아일랜드로 잘 알려진 연대도 등 아름다운 섬들로 둘러싸여있다.

이순신은 원균에 뒤이어 모여든 경상수군 장수들과 경상전라연합함대를 구성하고 통영과 거제 연안을 따라 동쪽으로 나아갔다.

 

거제 옥포 첫 해전 후 진해만 누비다

당포에서 뱃길로 30㎞ 정도 떨어진 거제도 동남쪽 송미포(남부면 다대리)에 이른 연합함대는 이곳에서 첫 출전 3일째 밤을 보낸다. 그리고는 다음날 적이 가덕도에 있다는 정보에 따라 조라포(일운면 구조라리), 지세포(일운면 지세포리), 장승포를 돌아 옥포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첫 해상전투가 벌어진다.

옥포만 안에는 부산포에서부터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경상도 동부 해안을 노략질하며 서쪽으로 진군해 오던 왜적선 50여척이 마침, 이날 아침 도달해 정박하고 있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산처럼 묵직하고 침착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는 이순신의 지휘에 따라 조선함대는 질서정연하면서도 기세 좋게 옥포만의 적진을 향해 돌진해 왜적선 26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다.

옥포에서 첫 승전고를 울린 조선함대는 북상해 거제도 북쪽 끝 영등포(장목면 구영리) 앞바다에서 전열을 정비하던 중 멀지않은 곳에 왜선 5척이 지나간다는 보고를 받고 합포(창원시 마산합포구) 앞바다까지 추격해 불태웠다.

두 번에 걸쳐 전공을 올린 이순신함대는 인근 난포(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난포리)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인 임진년 5월 8일 아침 일찍 이순신 장군은 진해 땅(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고리량에 왜적이 있다는 정보를 듣는다. 다시 바다로 나간 함대는 돝섬(일명 콰이강의 다리라 불리는 연육교가 있는 마산합포구 구산면에 있는 저도) 등 인근 해안과 섬을 수색하며 진군하다 적진포(고성군 거류면 당동리와 통영시 광도면 덕포리 중 한 곳으로 추정)에 정박한 왜선 13척을 발견하고 11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거둔다.

 

장군이 승리한 사천만 아픈 역사도 간직

제1차 출전에서 세 차례 전투를 통해 왜적선 42척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은 여수 본영으로 잠시 돌아가 전열을 정비하고 재출전을 준비하던 중 적선 10여척이 사천에 침범했다는 원균의 급보를 받는다. 그리고는 5월 29일 경상도 바다를 향해 두 번째 출전한다.

이순신함대는 사천만 깊숙이 위치한 왜성(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진을 치고 조선수군을 위협하던 왜적을 바다 한가운데로 유인해 내 거북선의 돌격, 철환과 총통 등 중화기를 사용해 13척을 격파했다. 이렇게 왜적을 격파한 이곳이 지금은 선진공원으로 조성돼 시민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됐다.

하지만 공원 입구에 위치한 조명군총은 임란의 수많은 아픈 역사 중 안타까운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조명군총은 정유재란 때인 1598년 10월 선진리성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을 마지막으로 몰아내려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아군 진중의 화약궤에서 발생한 폭발과 적의 역습으로 희생된 수천 명의 무덤이다.

사천해전에서 하루 종일 전투를 치른 이순신함대는 지금의 사천대교 기점인 모자랑포(사천시 용현면 주문리)로 물러나와 밤을 보내고, 다음날인 임진년 6월 1일 사량도로 옮겨 하루를 머문다. 그리고 당포에 왜적선이 모여 있다는 정보를 듣고 6월 2일 그곳으로 진격해 적선 21척을 불태웠다.

이어 6월 5일 아침 당항포(고성군 동해면과 거류면, 마암면, 회화면에 둘러싸인 바다)에 왜적들이 숨어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이동해 30척이 넘는 적선을 격파했다. 제1차 당항포해전이다.

당항포승첩을 거두고 이틀 밤을 인근 바다에서 보낸 이순신장군은 7일 거제 영등포 앞바다로 진군하다가 율포(거제시 장목면 율천리)에서 가덕도 쪽으로 도망치는 왜적선 7척을 발견하고 전투를 벌여 격파한다. 2차 출전의 네 번째 전투인 율포해전이다.

 

한산해전 끝내고 진영 한산도로 옮겨

두 차례에 걸친 출전에서 크고 작은 일곱 번의 전과를 올린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여수 본영으로 돌아갔다가 한 달 후 다시 경상도 바다로 제3차 출전에 나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은 왜적 수군이 서해로 진격하기 위해 총력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다.

여수를 떠난 이순신함대는 경상도 바다로 오다가 임진년 7월 7일 당포에서 밤을 지낼 준비를 하던 중 가덕도 방면에서 서쪽으로 진군한 왜적선 70여척이 통영과 거제 사이의 견내량에 와서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나중에 임란 3대 대첩으로 평가된 한산해전의 전투는 이렇게 찾아왔다.

긴장의 밤을 보낸 조선수군 연합함대 전선 56척은 날이 밝자 거북선 2척을 앞세우고 한산도 북쪽 견내량을 향해 나아갔다. 견내량에서 대열을 벌리고 있던 적선 73척을 한산도 북쪽 넓은 바다로 유인해 그 유명한 학익진전법으로 59척을 격파하는 대승첩을 거둔다. 조선수군은 그 여세를 몰아 이틀 뒤인 7월 10일 왜적이 머물고 있는 안골포(창원시 진해구 안골동)로 진격해 적선 20여척을 격파한다.

이어 두 달여 뒤인 임진년 9월 4차 출전에서 부산포해전, 다음해인 계사년(1593년) 2월 웅포(창원시 진해구 웅천동)해전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준 이순신은 이후에도 매달 여수에서 한산도 부근 해역으로 출전해야 했다. 부산에서 거제에 이르기까지 경상도 동쪽 해안에 진지를 구축하고 수시로 출몰하는 왜적을 감시하기 위해서다. 그러다 계사년 7월 14일 전라좌수영 본영을 아예 한산도로 옮기고, 한 달 후인 8월 15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남해군 이락산 이락사에서 바라본 노량해역 관음포 앞바다

남해 노량 관음포에서 마지막 전투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에서 남해대교를 지나면 왼쪽 아래에 이순신 장군을 모신 남해 충렬사가 노량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충렬사 경내 뒷편의 무덤은 이순신 장군의 가묘다. 노량해전에서 숨진 장군을 전라도 고금도로 옮기기 전 잠시 모셨던 자리다.

이곳에서 남해읍 쪽으로 조금 더 가다보면 오른쪽에 거북선 형상의 건물과 공사현장이 나온다. 건물은 이순신영상관이고, 공사장은 이순신순국공원 건설현장이다. 남해군이 임란 마지막 해전인 관음포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고현면 관음포에 조성하는 이순신순국공원은 내년 말에 완공될 예정이다.

이순신영상관 입구에서 관음포 바다로 600m 정도 길게 튀어나온 곶은 이순신 장군이 숨진 곳이라는 뜻으로 이락산(李落山)이라 불리고, 장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이락사(李落祠)가 있다.

정유년 9월 남은 전선 12척으로 명량해전에서 기적적으로 왜군의 서진을 막아낸 이순신 장군은 소강상태를 이용해 수군을 재건하면서 전쟁을 준비하다 다음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주력부대가 주둔한 순천 왜교성을 치기로 한다. 진린의 명나라 군대와 함께 수차례 왜교성을 공격하던 중 사천과 남해고성에 있던 왜적들이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노량 바다의 동쪽 창선도에 모여들었다. 임란 최후의 결전은 그렇게 다가왔다.

1598년 11월 18일 밤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연합함대는 창선도의 왜적이 몰려올 것으로 예상되는 노량 바다로 향했다. 다음날인 19일 새벽 노량해역 관음포(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앞바다에서 왜적선과 조우한 조명연합함대는 사생결단의 전투에 들어간다. 배와 배가 부딪히고, 불붙은 나무를 상대 함선에 던지는 초근접전에서 관음포 안으로 밀려간 왜적선들이 바다가 막혀 달아날 길이 없자 다시 돌아서 죽기로 대항했다. 그리고 관음포 앞을 벗어나 남쪽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단 한 척의 적선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진 이순신 장군은 군사들을 독려하며 적을 맹렬히 추격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탄환이 장군의 왼쪽 겨드랑이 부근 심장 가까이를 뚫고 지나갔다. 순간 치명상을 직감한 장군은 방패로 자신을 가리게 한 후 마지막 말을 남긴다. 지금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戰方急 愼勿言我死).

 

글사진 최춘환 편집장

경남공감 2014년 09월호[Vol.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