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풍요롭게/탐방

산청 구형왕릉 가는 길

고룡이 2021. 8. 26. 09:15

가을에 걷기 좋은 길

산청 구형왕릉 가는 길

 

가야 마지막 왕 잠든 곳에서

세월의 무상을 느끼다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 중턱에 있는 사적 제214호 구형왕릉(仇衡王陵) 가는 길은 화계마을 입구를 지나 능 주차장까지 차로 이동하게 되면 걷는 길은 채 1도 안 되는 짧은 길이다. 산청 4경으로 꼽히는 이유가 걷는 길의 운치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왕릉에 대한 궁금증이 커진다.

구형왕릉

왕릉으로 오르는 길은 잘 포장돼 있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데다 양쪽으로 식재된 소나무가 짙은 그늘을 만들어 쨍한 가을 햇빛에 들뜬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얼마 가지 않아 길 왼쪽에 류의태 약수터 가는 길 이라는 나무 팻말이 보인다. 명의의 이름이 붙은 약수터에 가야국 마지막 왕의 무덤까지 왕산은 세월을 거스른 과거에 푹 파묻혀 있다.

구형왕릉 입구 계곡

솔숲길이 끝나면 깨끗하게 정돈된 능 입구가 나온다. 능으로 건너가는 돌다리 앞에는 악귀와 액운을 물리치고 신성한 장소를 보호한다는 홍살문이 버티고 있다. 볼거리를 찾아 시끌벅적 유적지를 찾는 관광객에게 조용히 하라는 경고처럼 홍살문은 단호하게 서있다. 홍살문 사이로 넉넉한 개천을 건너는 돌다리, 그 너머 북동쪽으로 비껴 누운 왕의 무덤이 멀찍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승과 저승을 구분해 건너듯 왕이 누운 세상으로 돌다리를 건너간다.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고도 불리는 가야국 최후의 왕이다. 521년에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화려한 철기문화의 꽃을 피우고, 고대 일본, 백제, 신라와 중개무역으로 낙동강 유역의 최대 세력이었던 가야국. 그러나 성장기의 고구려신라백제 3국의 틈바구니에서 결국 가야국 마지막 왕이 되고 말았다.

 

패망국의 역사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 것일까?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금관가야의 세력이 이곳까지 뻗쳐 가야 왕실의 무덤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구형왕의 무덤이라는 확실한 근거는 아직 없는 상태다. 그래서 돌무덤의 정식 명칭은 전() 구형왕릉이다. 이끼도 끼지 않고 칡넝쿨도 뻗어 자라지 않으며, 나는 새도 쉬어가지 않는다는 구형왕릉. 하다못해 낙엽도 돌무덤 위로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갖가지 의문에 의문을 낳으며 전설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떠도는 왕릉에 대한 이야기들이 유적지의 분위기에 한몫을 한다. 가을날 오후 햇살이 왕릉 입구까지 따라오다 능역 입구 기와대문을 넘어서면서 사라져버린다. 능의 방향 탓이겠거니 해도, 산그늘이 어둡게 내려앉은 암회색의 돌무덤을 마주하고 서있자니 스산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높이 7.15m, 정면에서 보면 7단으로 이루어진 기단식 무덤인 구형왕릉은 피라미드와 반구형을 섞어놓은 돌무덤이다. 흙으로 덮는 당시 가야국의 묘제와 다른데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의 돌무덤이어서 많은 의문을 가진 묘형으로 알려져 있다.

 

첫인상은 부드럽게 돌탑을 쌓아올린 듯한 모습이다. 모양을 내 돌을 다듬은 것도 아니어서 1500년 가까운 세월을 한 자세로 지탱해낸 사실을 떠올려보면 그 아귀 맞춤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활용해 만들었기 때문에 앞에서 보면 7단이지만 뒤에서 보면 둥근 봉분 모양이다.

 

네 번째 단에 너비 40, 높이 40, 깊이 68의 감실이 있다. 아직 이 감실의 용도를 모른다고 하니, 그 또한 왕릉에 신비함을 더한다. 무덤 앞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새겨진 석비와 장명등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 무인석, 석수가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돌무덤의 가장자리는 무덤과 같은 종류의 돌로 쌓은 1m 높이의 돌담이 둘러쳐져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추측과 짐작이 더해져 빚어진 가야국의 마지막 역사는 그렇게 돌갑옷으로 여며져 있다. 돌무덤 앞을 지나가는 왕산의 계곡물도 견고한 돌담을 피해 흘러내린다.

구형왕릉 가는 길

왕릉을 뒤로 하고 내려오며 다시 걷는 솔숲의 시퍼런 강건함은 오를 때 느끼지 못한 세월의 무상을 역설적으로 느끼게 한다. 산 아래 펼쳐진 가을 들판 풍경도 먹고 사는 일로 바쁜 인간사의 번잡함을 일깨운다.

 

화계마을에 내려오면 1793년에 구형왕릉의 재실로 지은 덕양전(德讓殿)과 가야국 왕실 족보를 기록한 비석, 구형왕의 손자인 김유신의 활터 등 관련 유적들이 산재해 역사 속의 구형왕을 더 만날 수 있다.

 

경남공감201511월호[Vol.32]

·사진 황숙경 편집위원